[읽는 것] 어느 민주주의자의 서울대 권장도서 100선 읽기 (作. 이종보)
[0. 들어가면서]
100선을 언제 다 읽었지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방대한 책의 권 수 보다 저자의 드넓은 지식의 향연에 푹 빠져 읽었다.
[1. 책내용]
[1] 어떤 나라가 좋은 나라인가 – 플라톤 <국가>
최초 국가는 인간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업무와 기능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생활 공동체였다. 하지만 욕망이 불거져 협력 공동체가 ‘호사스런 나라’로 타락하고 염증을 앓는 상황에 이르게 됐다.
국가 공동체가 위기에 놓일 때 비로소 좋은 나라의 새로운 상이 제시된다. 좋은 나라는 사회 구성원들이 제가끔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만들어 질 수 있다. 플라톤도 <국가>에서 국가가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역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사람이 각자 타고난 기질과 성향에 따라 지혜를 발휘하는 국가가 좋은 국가다.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국가는 다양한 전문지식과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협력 공동체다.
[2] 국가는 인민의 안전과 평화를 보장하는가 – 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생명 보전과 평화 유지를 위해 인민은 국가에 힘을 몰아줬다. 그 덕분에 국가는 강해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국가는 인민의 권리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강탈할 수 있을 만큼 강해졌다.
인민은 자발적으로 국가를 만들었다. 군주를 ‘신의 대리인’으로 간주해 온 왕권신수설의 전통과 달리 홉스는 국가권력의 근원을 평등한 시민의 계약에서 찾았다.
홉스가 국가권력의 탄생배경으로 제시한 사회안정과 평화는 오늘날 많은 국가에서 정치권력을 옹호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정치권력자가 우려하는 것은 사회불안이 아니라 자기 권력에 대한 위협인 경우가 많다.
개인 분쟁이나 정치적 사안을 이성적 합의로 해결하지 않고, 재판에 의존하는 경향이 현대에 와서 크게 늘었다. 그 결과 사법권력은 공룡처럼 비대해졌다.
인민이 정치력을 스스로 향상시키지 않고 ‘권리 몰아주기’에 안주하면 국가권력은 언제든지 인간 이성을 불구로 만들 수 있따. 권리 양도 행태는 결국 인민과 권력 간의 간극을 벌어지게 만든다.
인민이 정치권력자를 지도하지 않으면 정치권력자는 인민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망각한다.
[3] 사회운동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가 – 존 로크 <정의론>
아시아, 동유럽에 이어 최근에는 아랍 국가들까지 민주화 운동이 민주주의 체제 성립에 기여했다.
정치권력의 근원은 인민에게 있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인 인민주권주의는 망각해서도 훼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민주권주의를 잃으면 민주주의의 영혼도 상실될 것이기 때문이다. 로크의 <정부론>에 따르면, 인민은 국가에 모든 권력을 위임하지 않고 제한적으로만 위임했다.
정부가 민주적 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성립되었다라도 기본권을 침해당한 사람은 각자의 의지에 따라 합법적으로 성립되었더라도 기본권을 침해당한 사람은 각자의 의지에 따라 저항해도 무방하다. 기본권 보장을 위한 권력 신탁은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항권 행사가 정치 혼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권을 방어한 인민이 그 책임을 짊어져야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기본권을 침해당한 자가 사회 혼란을 우려해 저항권 행사를 주저하면 누구도 그를 구제할 수 없다. ‘권리 위에서 잠자는 자는 누구도 보호하지 않는다. 인민은 스스로 권리를 지켜 인격을 표현해야 한다.’
투표권만으로는 인민의 기본권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다. 사회운동은 시민의 권리를 찾으려는 지속적이고 강력한 압력이다.
권력자의 기만을 저지할 수 있는 건 바로 깨어 있는 시민권 의식이다.
[4] 권력을 어떻게 다룰까 –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권력 추구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권력은 좋은 정치 공동체를 달성하는 데 필요하다. 탈정치적 태도는 인민의 삶을 개선시킬 수 없다.
통치자는 권력의 도덕성보다 권력 창출의 민주적 정당성에 더 신경 써야 하고, 권력은 인민의 지지와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
[5] 통치자는 권력으로 권위를 얻을 수 있는가 – 정약용 <목민심서>
인민은 권력이 두려워 통치자에게 복종할 수 있다. 하지만 통치자가 진정한 권위를 지녀 인민이 복종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통치자가 권위를 지녔는지 여부는 권력의 후광효과를 걷어낼 때 비로소 확인 된다.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아도 따르는 사람이 많으면 권위를 지닌 지도자로 볼 수 있다.
청렴은 통치자와 인민의 간극을 좁히는 바탕이 된다.
단순히 권력의 혜택만 좇는 통치자는 스스로를 벼락 부자처럼 인식하고 지배의 허세에 쉽게 길들여진다.
통치자가 중재자에게 필요한 균형감각을 상실하면 그 자체로 권위 없는 권력이 되어 권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권력을 부리는 자는 권위를 얻기 위해 자기 절제를 생활화하고, 주변의 정치권력을 멀리하며, 인민을 두루 살펴야 한다. 권위 없는 권력은 위태롭기 때문이다.
[6] 소통하는 정치는 어떻게 가능한가 – 맹자 <맹자>
사회에서 대립과 갈등은 항상 존재한다. 특히 민주주의 이행기에 갈등이 증가하는데,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권위주의 체제에서 억압된 주장이 민주화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표출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갈등은 사라지기 어렵다. 따라서 갈등을 억제하거나 소멸시키기보다 소통 역량을 키우는 일이 더 중요하다. 민주화 이후 통치자의 중요한 자질은 갈등을 조율하는 데 있다.
정의를 가려내기 어려울 때는 사회적 약자의 마음을 앞서 읽으면 된다. 약자의 의사는 타당성이나 절실함과 무관하게 단지 의사 관철 수단이 부족해서 논의 대상에서 배제될 수 있다. 통치자가 사회적 약자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대변할 때 공정한 정의가 세워질 수 있다.
[7] 통제 사회에서 어떻게 해방될까 –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규율 권력은 인간 신체를 통제하면서 개별화시킨다.
현대는 총체적 감시사회다. 권력자는 어느 시대나 사회 구성원을 통제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이후 정치 권력이 인간을 통제하는 방식은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은 눈에 보이지 않게 감시하는 장치의 대표 사례다. 감시자와 피감시자 간의 불균등한 시선은 권력관계를 창출한다.
특정 공간에서 다층위의 위계적 관계를 조직하고, 그 조직 안에 개인은 개체로 분할되어 편제된다. 개체화된 개인은 권력자에게 먹잇감이 되기 쉽다.
권력기관은 조각난 사람들을 다시 하나의 규율로 묶는다. 권력자는 개인에게 규율을 주입해 정교하게 지배한다. 위계가 주는 상대적 편익에 길들여지면 자유로운 인격을 지닐 수 없다.
[8] 억압 공간에서 벗어나면 자유로울 수 있는가 – 강경애 <인간문제>
세상은 교도소 같다. 왜냐하면 억압과 착취가 어디를 가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가 빚어내는 관계는 복잡하다. 권력관계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뿐만 아니라 권력의 협조자라는 중간 매개자가 결부되기 때문이다.
자유의 가치는 인간 내면에서 발견된다. 자유로운 인간의 존엄성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게 되지만, 현실에서 자유는 구체적인 제도와 문화로 만들어 내지 않으면 공허해질 수 있다. 서구 시민혁명에서 볼 수 있듯 인간은 오직 투쟁과 희생으로 자유를 쟁취해 왔다.
자유를 억압 공간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소극적 의미로 해석하면 자유를 획득할 수 없다. 자유는 현실에서 억압 권력을 혁파할 때 획득된다.
[9] 살기 좋은 나라를 찾을 수 있을까 – 최인훈 <광장>
농부가 밭을 탓하지 않듯, 살기 좋은 나라를 건설할 의지가 있는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나라를 탓하지 않는다. 새로운 공간은 지금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세계 위에 세워야 한다. 가장 살기 좋은 나라는 자기 손아귀에 있다.
[10] 국가 안에서 어떻게 자유를 확보할까 – 샤를 드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그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도록 하기 위해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유를 강조했다.
법은 신의 계시가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본성에 바탕을 둔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다.
자기를 구속하는 관계가 사라지면서 자기 존재감도 상실되기 때문이다.
인민의 의지가 국가 정치제도의 중앙을 관통해야 한다. 인민의 의지가 국가기관을 움직이지 못하면 국가기관의 의지가 인민을 움직인다.
‘인적 권력 분립’이 약화되자 국가기관 내 권력자들은 권력 기관을 옮겨가며 특권을 누렸다.
시민의 권력 위임 이후 시민 위에 군림하게 된 권력층은 동종 교배하여 시민의 통제에서 더욱 멀리 달아났다.
구체적으로 정치 참여 운동을 통해 국민입법, 자치행정, 배심원 제도 등을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게 바람직하다. 인민의 의지가 국가 정치제도의 중앙을 관통해야 한다. 인민의 의지가 국가기관을 움직이지 못하면 국가기관의 의지가 인민을 움직인다.
[11] 결사의 자유를 어떻게 다룰까 – 알렉산더 해밀턴-존 제이콥-제임스 메디슨 <페더랄리스트 페이퍼>
파벌은 민주주의와 충돌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파별이 사회 전체를 포괄하지 못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인간을 경계 짓는 모든 구분에서 해방될 때 인간은 자유롭다.
[12] 종교의 정치 세력화를 어떻게 볼까 – 일연 <삼국유사>
미국의 건국을 이끌었던 토머스 제퍼슨이 종교와 정치의 관계에 대해 “뭉치면 죽고 분열하면 산다”고 했듯, 종교의 정치 세력화는 민주적 정치 공동체를 위해 억제되어야 한다.
종교는 삶의 의미나 목적과 관련된 통찰력을 세속인에게 제공해야 한다.
종교의 정치 세력화는 장기적으로 종교를 강화하기는커녕 존립 근거를 스스로 파괴할 수 있다. 결국 종교인은 현실 정치를 계도하지 못하고 오히려 현실 정치에 끌려가게 된다.
[13] 민주주의 체제에서 평등이 왜 중요할까 – 알렉시스 드 토크빌 <미국의 민주주의>
중앙집권화 체제에서는 다수의 독재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토크빌은 사회가 다원화되기 위해서는 시민 결사와 언론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보았다.
평등과 자유는 양립할 수 있다.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바탕으로 하여 자유를 지향한다.
평등은 자유를 증진하여 민주주의를 발전시킨다. 토크빌은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미국이 평화로운 민주사회가 된 근거를 특권 질서의 부재, 평등하고 자유로운 타운 공동체, 그리고 높은 수준의 교육과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적 생활습관에서 찾았다.
생활상의 불평등을 해소해 시민의 민주적 의사결정 능력을 향상시키는 게 중요하다. 빈곤층은 생계 문제 때문에 선거일에도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경제생활이 향상되면 사람들은 국가 공동체 일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여유도 가지게 된다.
[14] 자유민주주의가 가장 좋은 민주주의인가 – 에릭 홉스봄 <자본의 시대>
혁명은 권력의 변화를 초래한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은 권력체제를 재편하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발전을 낳았다.
자유민주주의의 성립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간의 투쟁에서 자본주의가 승리한 결과다. 홉스봄에 따르면 프랑스 시민혁명의 종국적 실패와 산업혁명에 따른 자본주의의 본격적 팽창 때문에 부르주아가 승리하는 자본의 시대가 형성되었다. 홉스봄은 프랑스혁명의 주도권이 노동자 계급에서 부르주아로 넘어갔던 근거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이에 부르주아가 편승한 사실을 주목한다. 시민혁명이 진전되어 노동빈민계급이 혁명 권력을 장악하고 급진적 성향을 보이자, 부르주아는 위기감을 느끼고 시민혁명에서 이탈했다. 혁명의 균열이 나타난 것이다. 과거 귀족이 시민혁명에 맞서 저치권력을 다시 장악하고 자유주의적 경제 프로그램을 발전시키자 부르주아는 혁명을 배반한다. 부르주아는 보수적 지배계급과 타협해 국가에서 결정적 지위를 점했다. 산업혁명의 자본주의가 시민혁명의 민주주의를 압도한 셈이다. 결국 자본의 시대는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와 연계되고, 경제적으로 자유주의가 결합한 보수적 자유민주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는 합리적 절차에 따른 민주주의 체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대의제 자체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도모한 것은 아니다. 그 일차적 요인은 부르주아의 정치적 전략에 따른 의회 잠식에 있다. 결국 대의제는 경제적 자유주의 정신을 법과 제도로 구현하는 데 기여하여 근대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한계를 지니게 됐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려면 과연 다양한 사회 세력이 실질적으로 동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건을 갖추었는지부터 검토되어야 한다. 제도적 차원뿐만 아니라 내용적인 면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입지를 고려한 논의가 가능할 때 민주주의에 새로운 희망이 생길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자유민주주의를 대체할 양식으로 정치 민주화와 경제 민주화가 함께 작동하는 민주주의를 고려해 볼만 하다.
[15] 자본주의는 자연적 질서인가.
자본주의 체제를 신비한 자연 원리로 다룰수록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발견하기란 더욱 어려워진다. 자본주의를 대체할 대안을 찾는 노력도 비현실적으로 여기게 된다.
브로델에 따르면 좀처럼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일상생활(물질문명)’이 존재하고, 그 위에 교환활동이 조직되는 ‘시장경제’그리고 최상의 층위엣 조직적으로 이들을 통제하는 ‘자본주의’ 가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가 인위적으로 구성된 사실을 뒤집어 생각하면 시민의 정치적 행동이 시장경제의 성격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사회의 의지가 집약된 공권력의 활용 방향에 따라 시장경제으 모습이 다를 수 있다. 이를테면 영미형 국가, 서유럽, 북유럽의 시장경제가 각각 다르다. 일국의 시장경제도 독점과 담합에서 사회적 협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독점 기업가나 사회적 협동조합 혹은 노동자의 입장이 혼재하는 시장경제에서 그 비중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조절하느냐에 따라 경제는 달라질 수 있다.
[16]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신성한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본질은 노동에 있다. 인간은 노동으로 성장했다. 인간 사회는 노동자의 노동 없이 풍요로울 수 없다.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구호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도 내걸렷듯. 죽음이 예정되어 있는 자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하며 노동을 찬미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기만적이다. 노동의 신성함이 진정성 있는 구호인지 판별하려면 노동의 신성함을 언급한 의도와 실태부터 파악해야 한다.
자본주의 태동기에는 교회가 선도적으로 노동을 찬미했다. 베버에 따르면 노동의 신성함은 노동자에게 노동을 가제하여 신에 귀의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였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에 기여했다.
모든 사회적 노동이 결합한 성과물을 국가나 기업이 차별적으로 배분하면서 노동의 신성함은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없었다. 노동의 양극화가 심화될수록 경쟁력을 상실한 노동을 신성하기는커녕 천대받기 일쑤였다. 결국 현대사회에서는 특정 노동만이 신성하다.
노동자를 보호하지 않는 노동의 신성함은 허구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없어야 하고, 직업 간의 임금 차이도 최소화되어야 하며, 노동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노동의 불평등을 개선하지 않고 노동의 신성함을 언급하면 자본주의의 탐욕을 지원하는 행위에 동조하는 셈이다.
[17] 누가 일중독으로 내모는가 – 프란츠 카프카 <변신>
노동은 혈연 공동체를 유지하는 자원을 제공하고, 혈연 공동체의 정서적 유대는 힘든 노동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된다. 그런데 현대 노동은 가족 공동체에서 차지하는 본질적 의미를 잃고 노동 압박만 가중되었다. 일은 중독에 가까운 ‘사건’이 되었다.
일중독의 압박이 가족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일중독에 빠진 현대인은 고독하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회사 일에 빠져 살아가던 그레고르 잠자도 현대인처럼 고독하다. 잠자가 갑자기 흉측한 벌레로 변했을 때 어떤 가족원도 그를 위로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는 “돈이 피보다 진하다”.
경제적 가치가 가정에 침투하면 인간은 존재감을 상실하기 쉽다.
가족의 압력에 내몰린 현대인은 일에서 자아실현을 추구하지 못하고 화폐 가치속에 유폐된다. 결국 가장은 가족원의 소비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기계로 전락한다.
노동의 부담을 사회가 나눠 짊어질 수 있으면 일중독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는 개선될 수 있다. 무엇보다 과잉 노동을 요구하는 삶의 환경부터 개선해야 한다.
[18] 개인 노력으로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나 - 아담 스미스 <국부론>
아담 스미스는 단순히 방임적 자유시장이 아닌 공정한 시장에서만 국부가 증진될 수 있다고 보았다.
경제 운영의 본질은 상호의존성에 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에 따르면 분업과 교환이 사회 진보를 이끌었다.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자기 삶의 풍요도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존하여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생산물은 많은 노동자의 노동이 결합된 산물이기 때문에 물적 소유량으로 판단되는 부유함은 결국 개인 능력의 징표가 아니다. 부자는 가난한 사람보다 더 많은 사람의 노동에서 덕을 봤을 뿐이다.
사회적 재분배를 둘러싼 갈등은 부의 원천을 자기 능력으로 보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상호의존성이 깊어진 오늘날, 타인의 노동에 윤리적 관심을 두지 않으면 모든 물적 풍요는 인간으로서 수치스럽게 여길 일이다. 어느 사회라도 노동자가 가난하고 비참하면 그 사회의 풍요로움은 정의롭지 않다. 왜냐하면 노동은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반면 타인의 노동조건을 개선하고 정당하게 대가를 지급하여 타인의 자립을 도울 수 있으면, 물적 풍요뿐만 아니라 정신적 풍요도 함께 누릴 수 있다.
[19] 상품화는 어떤 문제를 일으키는가 – 칼 마르크스 <자본론>
노동 생산물이 상품으로만 보이면 인간의 노동 가치는 무시된다.
상품 세계는 인간과 물적 존재의 밀접한 관계를 단절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떠나 또 다른 상품과 비교되는 ‘상품 인간’이 되었다. 그 결과 인간관계의 본질적 존재감도 약화되었다.
[20] 상업적 관계를 신뢰할 수 있나 - <청구야담>
신분제 사회의 관계는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지배계층은 신분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태생적 신분 귀속을 강압적으로 몰아붙였다.
신분사회의 해체가 평등 사회의 도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돈의 위계가 신분 위계를 대체했다. 사람들이 돈의 위계에 굴복하여 상업적 관계가 인간관계를 지배했다.
[21] 자유는 왜 소중한가 –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다수의견에 부합하는 의사표시는 같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자격이자 보증이기 떄문이다. 하지만 다수의견에 안주하는 사람은 여론을 자기 생각인 것처럼 내세움에 따라 자기를 독자적으로 완결된 존재하고 생각하지 못한다. 다수의견에 따르기만 하면 궁극적으로 인격체로서의 자기 가치는 훼손된다. 왜냐하면 다수와 다른 생각을 자유롭게 상상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자유로우면 개인은 자기 생각의 근거와 이유를 스스로 찾아낸다.
소수의견도 잘못된 의견일 수 있다. 하지만 밀이 주장했듯, 소수의견이 오류라고 할지라도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으면 옳은 의견과 대비되어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다.
잘못된 소수의견에 대배 발성할 수 있는 기회조차 박탈하면 결국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경험이 부메랑이 되어 올바른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마저 위협하게 될 것이다. 반인권적 발언은 반드시 비판받아야 하고 용인될 수 없다. 하지만 파쇼적 방식으로 금지해서는 안된다.
[22] 이념과 사상의 혼란을 어떻게 볼까 – 공자 외 <제자백가의 사상>
내비게이션에 의존하여 운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스스로 길을 찾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주지 않는 길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더욱이 사회 방향을 찾는 데에는 마땅한 네비게이션이 없다.
법가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 분서갱유가 나타났듯 무리한 사상 통일은 인간의 기본권인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24] 사익과 공익이 충돌할 때 어떻게 행동할까 – 키케로 <의무론>
개인적 이익과 사회적 이익 사이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판단하기 힘들 때, 항상 고려해야 할 기준은 ‘헹위의 정당성’에 있다.
도덕적 선을 따르지 않는 행위는 궁극적으로 개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적 선을 따르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번민과 불안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사익을 경계하는 도덕적 행위가 역설적으로 개인에게도 유익하다.
사회적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가 현실 사회에서 좀 더 설득력을 가지려면 사회적 이익 추구가 개인에게도 이익이 된다는 점을 사실로 보여줘야 한다.
정의 추구가 단지 옳기 때문만이 아니라 개인에게도 유익해야 현실적으로 정의에 동참하는 일이 많아진다. 정의 실현이 개인과 사회에 유익하려면 정의의 원칙을 관철하는 데 더욱 공정해야 한다.
[25] 갈등은 어디에서 기원하는가 – 황순원 <카인의 후예>
자연물을 둘러싼 인간의 갈등은 인간성을 파괴한다. <카인의 후예>에서 토지개혁이 추진되자 지주 박훈의 집에서 평생 마름으로 일했던 도섭 영감도 사회주의 세력과 연계하여 지주 박훈과의 주종관계를 파기하고 적대적으로 변모한다.
토지 개발 및 개혁은 토지를 공공재로 보는 발상에서 시작해야 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축복 위에 소유권이 덧칠되면서 위계화된 사회가 되고,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되어 인간 스스로 인간관계를 파괴하도록 조장했다.
[26] 우리는 평화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가 – 안톤 체호프 <벚나무 동산>
<<벗나무 동산>>에서 몰락한 귀족 지주인 라네프스카야 부인이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한 어떤 행동도 하는 않는 태도는 급변하는 현실 사회에서 스스로를 낙오시킨다. 행여 주변 사람이 도움을 줘도 자기 스스로 자기 권리를 찾거나 다툴 의지가 없으면 현실을 조금대 개선할 수 없다.
무기력하게 살면 의욕적인 사람의 지배를 허용한다. 시민이 무기력하게 살아갈수록 그 시민의 안일한 태도를 이용하여 지배의 기회를 잡으려는 권력자가 많다. 이를테면 민주화 이후, 선거 시기 대표자를 선출하는 것에만 만족하면 의욕적인 대표자들이 시민 위에 군림하기 쉽다. 민주화에 앞장선 정당이 선거 패배로 좌절하며 무기력한 정치를 연장할 때도 과거 독재정권에 협조했던 상대 정당은 지배체제를 쉽고 강고하게 구축할 수 있따. 시민이 온순해질수록 권력자들은 강력해지게 마련이다. 지배를 허용하고 싶지 않으면 누구도 자기를 랍고 지나갈 수 없도록 의욕적으로 저항해야 한다.
[27] 비폭력주의는 진리인가 – 마하트마 간디 <<간디 자서전>>
클라우제비츠가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듯, 폭력은 정치 수단이기도 하다. 폭력과 비폭력은 균형 잡힌 정치적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비폭력적 저항은 강한 물리력을 가진 특정인의 전유물도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신념만 있으면 비폭력적 대응이 가능하기 때문에 비폭력적 저항은 보편적인 정치 수단이다.
국가가 저항 정치를 억제하려는 이데올로기로 비폭력주의를 활용하면 생명존엄의 정치는 더욱 묘연해진다. 따라서 폭력적으로까지 분출될 수밖에 없었던 절실한 사회적 요구에 귀 기울여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조율할 필요가 있다.
[28] 일반인은 사회 범죄에 책임이 없는가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범죄를 행위로만 보지 않고 의식적 차원으로 확장해 보면 누구도 범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든 사람은 모든 사람들 앞에서 모든 것에 대해 죄인이 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범죄행위를 하지는 않았고 단지 마음속으로 바랐을 뿐인데 바람이 죄가 될 수 있는지 문제를 제기한다.
범죄는 태어날 때부터 만들어지지 않고 사회적으로만 나타난다. 범죄의 사회성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범죄 발생의 원인을 개인이 쉽게 바꿀 수 없는 사회 구족 탁으로 돌려 자기는 면죄부를 받으려 한다. 하지만 범죄의 사회적 의미를 제기하는 이유는 자기를 포함하여 사회 구성원 전체가 책임의식을 공유하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자기는 사회 범죄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며 사회문제에 무관심한 사람이 있으면 그는 범죄를 방임한 탓에 이미 범죄의 공범자다.
사회 범죄는 곧 자기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 삶을 사는 일반인도 언제든지 범죄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0] 서구 근대성은 비서구 사회에서 어떻게 왜곡되었나 – 나쓰메 소세키 <마음>
- 근대화는 인간 존엄성에 뿌리를 두고 합리성과 주체성에 입각한 사고와 행동을 강구했다. 물론 서구의 근대성은 사회적 산물일 뿐 맹목적으로 추종할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33] 애국주의는 사회 공동체를 위한 선이 될 수 있을까 – 아이스퀼로스 <그리스 비극 : 아가멤논>
애국주의는 다양한 개인을 국가에 귀속시켜 사회를 통합하는 데 유용했다. 하지만 애국주의는 폭력적 통합성을 지닌 탓에 개인 인권을 침해하고 분쟁을 유발한다.
애국주의는 국가의 영광을 위해 개인을 단지 희생되어야 할 개체로 다룬다. 애국주의에 경도된 지도자는 개인을 국가 소유물로 보고 처분권을 행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스 비극> 중에서 아가멤논도 애국주의를 강조하여 개인 생명을 등한시한 인물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강풍과 위험한 파도 때문에 출정하지 못하게 되자,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폭풍을 달래기 위해 딸 이피게네이아를 여신에게 제물로 바친다. 트로이를 정복하여 그리스를 융성하게 하고 명예를 높이려는 그의 야망이 혈육마저 도구로 삼게 만든 것이다.
[35] 개인 삶은 역사적 운명에 종속되는가 – 박경리 <토지>
개인은 장구한 역사의 한 점에 불과해 보인다. 하지만 그 한 점 한 점이 모여 역사를 이룬다.
구시대적 질서를 뒤집은 수평적 관계는 개인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힘이 된다. 위계적 사회관계를 유지하면서 아래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수직적 지배관계에서 낮은 신분의 사람은 상위 계급에게 복종할 수 있어도 진심을 바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회관계가 수평적 관계로 전환되지 않으면 역사적 고난을 극복할 힘이 생산되기 어렵다. 조선 말 민중의 힘으로 일제 침략에 맞설 의지가 없었던 조선 왕실의 한계에서 볼 수 있듯, 위계화된 사회관계는 역사의 거대한 힘을 막는 데 무력하다. 삶이 역사의 굴곡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하는 데에는 포용성이 중요하다.
[37] 대중적 삶은 무기력하기만 할까 – 박태원 <천변풍경>
대중적 삶이 항상 무기력하지는 않다. 대중적 삶은 역사적 삶으로 등장하기에 앞서 잠재되어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삶이 일상적으로 순환하고 반복되더라도 어느 누구도 역사의 시간 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40] 과거를 실증적으로 탐구하면 역사왜곡을 막을 수 있을까 – 헤로도토스 <역사>
‘역사’를 지칭하는 ‘Historia’는 그리스어로 ‘조사하다’라는 뜻이다.
진정한 역사 탐구는 역설적이게도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탐구할 때 가능하다. 역사적 사실을 해석하는 주체가 누구이며 어떤 사실을 어떤 이유로 해석하고 있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 수 없다.
[41] 예술과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 아르놀트 하우저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물론 그림이나 조각 같은 예술 작품이 사회의 왜곡된 가치를 전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누드화에 남자 누드화보다 여자 누드화가 많고, 누드 조각상에서 흑인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듯 예술 작품의 아름다움은 사회적 차별의식을 반영할 수 있다.
[42] 정보화 시대에서 무한한 정보를 어떻게 다룰까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 정보의 풍요 속에서 지식은 오히려 결핍되었다.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하면서 데이터의 양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하지만 ‘지식’이 될만한 정보는 더욱 찾기 어렵다. 정보는 주어진 데이터이고, 지식은 주어진 데이터를 분별하여 꺼내 온 원리이다.
[43] 미디어 테크놀로지는 인간 문화를 어떻게 바꾸는가 – 마셜 맥루언 <미디어의 이해>
- 미디어가 인간 신체의 일부라 하더라도 그 신체를 작동하게 하는 주인은 여전히 인간의 정치적 의지다. ‘미디어 신체’로 인간의 감각 기능이 확장돼도 그 감각기관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별개며, 이는 감각기관의 기능보다 더 중요하다.
- 인터넷 네트워크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여 사회에 평등 가치를 확산시키리라는 기대는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인터넷 권력으로 등장한 파워 블로거처럼 네트워크는 수직적 위계에 따라 재조직될 수 도 있다. 인터넷 네트워크가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여 사회적 평등을 확산시키리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권력적 위계를 구성하려는 인간의 의식은 미디어의 기술 발달과 상관없이 존재한다.
[46] 삶과 죽음의 순환에서 인간 존재는 무기력한가 - <우파니샤드>
<우파니샤드>는 힌두교 경전 중 하나다. ‘우파니샤드’란 가까이 앉는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조용히 전수된 가르침을 의미한다. 우파니샤드에서는 우주의 근본원이를 브라흐만이라 부르고, 개인에 내재하는 근본원리를 아트만이라고 부른다. 소우주인 아트만에서 대우주인 브라흐만을 보게 되면 아트만과 브라흐만은 결국 동일하다. 자신을 비우고 자연과 융합된 삶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범아일여라고 한다.
세상의 근원적 진리는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 있다. 참된 자아는 자기 결정과 의지를 믿으며 삶과 죽음으로 순환되는 모든 사건 위에 서 있다. 결국 진리는 자아를 키우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를 미생물처럼 왜소하게 인식하면 존재 의의를 찾기 어렵다. 타인을 삶의 대타자로 내세우는 행태도 자아를 왜소하게 만드는 사례다. 왜소한 자아를 지닌 자난 사소한 문제조차 해결하는 데 버거워한다. 반면 존귀한 자아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스스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의연해질 수 있다.
[51] 생각할 수 있으면 인간인가 –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인간적인 세상이 되려면 반드시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말은 확산되기 쉽지만 잊히기 쉽고, 행동은 따르기 어렵지만 영혼까지 전염시킨다.
언어는 사유가 아닌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인간성을 찾기 위해 스스로 죽음도 선택한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인간답게 살기 위해 죽음으로 항거한 전태일이 대표적 사례다. 죽음 앞에 유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죽는 그날까지 인간 존엄을 실천할 수 있으면 인간성은 죽음 이후에도 소멸되지 않고 영원하다. 전태일의 죽음은 개인적 실천이지만 역사 속에서 인간다움의 중요성을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전이시켰다.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소멸되지만 인간성의 가치가 존속하는 이유는 인간다운 삶을 위해 생각보다 실천을 앞세운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54] 세대 간 갈등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염상섭 <삼대>
다른 사랃믈의 고통에 둔감하면 어느 집단도 소통하기 어렵다. 세대론이 조장하는 거짓 동료 의식을 거부하고 ‘세대 묶음’ 대신 ‘고통 묶음’으로 세상을 가르는 게 현실적이다. 세대 갈등을 해소할 소통은 세대를 넘어 삶의 고통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의 연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른 세대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삶의 고통을 공유할 때 제한적으로나마 진정성 있는 세대 간 소통이 가능해진다.
[56] 이분법적 사고는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 장주 <장자>
하늘과 땅은 자연의 하나일 뿐 대립하지 않는다. 자연을 하늘과 땅으로 가르면 그 밖의 다른 자연물은 존재 근거를 찾기 어렵다. 하늘과 땅의 대립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방식을 인간 세계에 적용하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하늘과 땅의 극단적 분류는 인간과 동물, 남성과 여성 등으로 위계화된다. 사물과 현상을 이분법적으로 분류하는 데 익숙해지면 삶의 보편성을 이해하지 못하여 사회적 정치적 적대를 양산한다.
[60] 사회를 위해 소수를 희생시키는 게 합리적인가 –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물을 흐린다”라는 속담에는 폭력성이 깃들어 있다. ‘사회 안정을 위해 미꾸라지 한 마리쯤은 제거해도 무방하다’는 생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속담에는 사회적 낙인 폭력도 용인할 것 같은 느낌이 담겨 있다. 하지만 낙인찍기로 사회가 발전할지는 의심스럽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고인 물도 흐르게 할 수 있다. 금기에 도전한 사람들이 ‘닫힌 사회’의 물고를 튼 결과 인류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현재의 지배질서에 어긋나는 모든 사유와 행동이 분열과 소란의 주범으로 비난받기만 하면 인간의 역사는 조금도 진전하지 못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경계 범위 내에서만 안일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면 그 사회는 정체된다. 낙인찍히는 것이 두려워 낙인의 부당함에 맞서지 않는 사회는 그 자체로 발전 없는 폭력 사회다. 정체된 사회나 폭력 사회에서는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61] 사회적 약자의 인권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가 - <춘향전>
불평등한 체제에 대항하여 동등한 존엄성을 일관되게 제시하고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전략은 약자가 사회적 공감을 얻어 내기에 유용하다. 인권을 침해한 권력의 위협에 맞서 그 부당성을 지속적으로 설파하고 사회적 공감을 확장할 때 인권이 탄생한다. 인권은 단순한 상상으로 확보되지 않는다.
[62]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 헤경궁 홍씨 <한중록>
한국 사회에서는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며 남편에 따라 여성의 삶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정서가 팽배하다. 여성의 삶은 자기 역사를 갖지 못하고 수동적으로 규정되어 왔다. 그 결과 남성이 세워 놓은 폭력적 권력 체계에서 여성은 실존 자체를 위협받는다.
[79] 욕망을 억제하기만 해야 할까 – 지그문트 프로이트 <꿈의 해석>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의 본질은 미래를 예언하는 게 아니라 소원을 성취하는 데 있다.
[81] 삶의 고통이 아프기만 할까 – 샤카무니 붓다 <아함경>
고통은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경고 메시지다. 의미 없는 존재나 현상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고통도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통증은 몸과 마음의 이상 징후를 알리는 신호다. 통증이 있기에 병을 진단하거나 치료할 수 있게 된다. 삶의 고통도 지금까지 살앙온 삶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려 준다. 고통 증세는 고통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추궁하게 만든다. 그리고 삶의 형식을 적절하게 조정하도록 자극 한다.
[83] 악행을 응징하는 사람은 선한가 – 윌리엄 세익스피어 <햄릿>
악행을 강력한 의지로 종결짓지 않고 불씨를 살려 놓으면 불의는 역사의 뒤엉킴 속에서 되살아난다. 한국 역사에서 친일파의 잘못을 청산하지 못한 일은 그 좋은 사례다. 악행의 용서나 화해를 논하기 전에 정확하게 악행을 기록하고 처벌하는 일은 후세에 악행의 부활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 정의 구현을 위한 정당하고 합법적인 응징 행위가 지연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정의에 대한 인식의 결여와 행위의 망설임은 역사의 겁쟁이를 만들고 중차대한 정의 구현 계획을 행위로 이어지지 못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악행을 반드시 처벌하되 처벌 방법은 사회적으로 분별력이 있어야 하고 보편적 가치에도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악행을 응징해야 하지만 악행에 대항하다 악인을 닮는 일은 없어야 한다.
[88] 사랑은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사랑은 서로 다른 환경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만나 관계를 맺는 것이기 때문에 늘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사람들은 사랑하고 다투면서 성장한다. 궁극적으로 사랑의 힘은 사람을 바꾸어 놓는다. 사랑하는 관계의 성격에 따라 사랑은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지만 오히려 파괴할 수도 있다.
[93] 근대의 과학적 탐구 방법이 우상을 해체했는가 – 프랜시스 베이컨 <신기관>
과학은 인류가 미신과 독단에서 벗어나도록 도왔지만 과학 자체가 신이 되면 과학의 오류를 극복하기 어려워진다. 과학의 객관성 자체를 의심할 수 있는 반성적 사고가 필요하다.
[99] 인간은 유전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는가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도킨스는 밈(Meme)이론으로 유전 영역을 인간 문화로까지 확장한다. 유전적 진화의 단위는 유전자다. 반면에 문화적 진화의 단위는 밈으로 설정한다. 문화 전달에도 유전자처럼 복제 역할을 하는 중간 매개물이 필요한데, 이 역할을 하는 정보의 단위, 양식, 유형, 요소가 밈이다. 유전자가 하나의 생명체에서 다른 생명체로 복제되듯, 밈도 복제된다. 밈은 모방을 통해 복제된다. 생명체가 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해 자신의 형질을 후세에 전달하듯 밈도 자기복제를 통해 널리 전파되고 진화한다. 밈은 좁게는 한 사회의 유행이나 문화 전승을 가능하게 하고, 넓게는 인류의 다양한 문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100] 복잡한 세계를 어떻게 과학적으로 이해할까 – 제임스 글릭 <카오스>
카오스 이론은 예측이 불가능한 매우 불규칙적인 상태에서도 논리적 법칙과 질서가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2. 감상후기]